1. 존 폰 노이만의 생애
존 폰 노이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노이만의 헝가리식 이름은 '너이먼 야노시 러요시'로, 가족들은 그를 '연치'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노이만의 아버지인 너이먼 믹셔가 1913년에 작위를 사면서 노이만 가문은 귀족으로 신분 상승하였고, 이로 인해 독일식 이름에 폰이 붙어 요한 폰 노이만이 되었습니다. 사교적이고 파티를 즐기는 유머러스한 성격이었으며, 스포츠카와 패션에 관심이 많아 늘 고급 투 버튼 정장만을 입었다고 합니다.
노이만은 공교육 대신 10세까지 집에서 가정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는데, 자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과 함께 다양한 학문을 조기교육 받았습니다. 그 결과 노이만은 고작 8세의 나이 때 이미 미분과 적분에 능통했고,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까지 섭렵했습니다. 그는 1911년 8세 때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수준 높은 엘리트 학교인 파소리 김나지움에 입학해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나지움의 교사였던 라츠 라슬로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는 노이만의 특출난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아버지와 상담을 했습니다. 라츠 라슬로는 노이만에게 더욱 수준 높고 어려운 고급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노이만의 아버지는 이를 원치 않았고, 결국 학년과 반은 그대로 다니되 노이만의 고급 교육을 위한 뛰어난 학자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이후 학업을 무사히 마친 폰 노이만은 부모의 바람대로 산업계에 종사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해 화학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수학이었습니다. 1927년 교수 자격시험인 하빌리타치온을 최연소인 25세의 나이로 통과한 존 폰 노이만은 다음 해인 1928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사상 최연소 강사로 임명되었으며, 함부르크 대학교에서도 강사로 초빙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나치 독일이 탄생하자 노이만과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미국식인 존으로 개명했습니다.
1929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수리물리학 강사로 일했습니다.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진 4명 중의 한 명이 되었으며, 이때 이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고등연구소의 수학 교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폰 노이만은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미국 국방부의 자문위원이 된 노이만은 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정부 내 과학자들 중 최고 직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955년 그는 췌장암을 진단받고 암이 이미 뼈와 골수에 치명적으로 전이되어 시한부 상태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암에 걸린 것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노출된 방사선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이만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고, 본래는 불가지론자였으나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불신자로 죽는 것이 손해이니 믿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가톨릭에 귀의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노이만이 가톨릭에서 큰 위안을 얻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력상 미국의 군사기밀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탓에 면회가 가능한 인물도 매우 소수였다고 합니다.
죽기 전까지 괴테의 '파우스트' 구절들을 즐겨 암송하던 존 폰 노이만은 1957년에 미국 워싱턴DC의 월터리드 미군 의료센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 업적 및 평가
존 폰 노이만은 인류 역사상 내로라하는 천재들 중 가장 천재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됩니다. 압도적인 학문적 천재성으로 주변인들에게서 '악마'나 '반신'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존 폰 노이만과 함께 김나지움을 다닌 친구이자 훗날 노벨상을 받기도 한 유진 위그너는 한 기자에게서 '어떻게 헝가리에는 그토록 뛰어난 천재들이 많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진짜 천재는 오직 존 폰 노이만 뿐'이라는 대답을 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노이만은 뛰어난 수학적 재능으로 양자역학, 경제학, 집합론, 함수 해석학, 위상수학, 기하학, 통계학, 수치해석, 컴퓨터과학 등 숱한 학문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 역학에 접목시킨 최초 선구자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일생 동안 응용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순수 수학 60편 등 총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사망 직전까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컴퓨터와 뇌'를 집필하다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도 기여 및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한 기상 예측을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며, DNA, RNA의 구조를 최초로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21세기에 만들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컴퓨터는 존 폰 노이만이 창안한 '폰 노이만 구조'를 따라 개발되고 있습니다.
노이만이 1944년에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저술한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은 지금까지도 판매되고 있는 서적이며 이후로 노이만의 게임 이론을 연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물들이 여럿 배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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